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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다큐멘터리 사진-서론, 본론

jo-johan 2008. 10. 14. 09:49
다큐멘터리 사진-서론, 본론


서 론

현대사회를 정보화의 시대라 한다. 역사이래 사람들은 자기의 사상이나 감정을 표현하는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는데 인간이 보고 알고 전달하는 본능은 회화적인 기호에서 부터 시작하여 문자를 발명하고 메스 커뮤니케이션 할 수 있는 인쇄술의 발달로 대량전달의 시대로 접어들었다.

직접 자기의 눈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현대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는 것이 다큐멘터리 사진이 나오게 된 이유라 하겠으며 메스 커뮤니케이션의 매매수단으로 사진술은 중요시 되고 있다. 현대사회가 고도화되고 다변화되어 감에 따라 현대인들은 문자를 읽고 정보를 얻는 것 보다는 영상을 통한 직접접촉을 원하게 되어 읽는 것에서 보는 것으로 전환되어 사진이 시각언어의 역할로 증대되고 있다. 과거의 다큐멘타리 사진은 발생 당시 객관적이고 공론적 입장에서 포토-캠페인 운동으로 문자를 대신하여 대중들의 여론을 설득시켜서 공감을 갖도록하는 시각적 언어로 사용되어 발전되었다. 오늘날 와서는 그것이 1950년대를 기점으로 다큐멘타리 사진이 사적이고 주관적인 개인영상의 세계로 변환되는 과정까지를 현대의 사진으로 편의상 구분할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미국의 다큐멘터리 사진중심으로 범위를 잡았다.


본 론 1

1) 다큐멘타리 사진의 개념과 특성

"다큐멘타리 사진은 사건이나 문화적 현상등에 관한 사실적이고 신빙할 만한 인식작용을 예술적 형식으로 기록하거나 묘사하는 일이다." 이 정의에서 특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사실적(Factual)이란 말과 예술적(Artistic)이란 두 단어 아래 이들은 다큐멘타리 사진의 본질을 암시하고 있다. 즉 주제나 사건을 사실에 근거를 두어야하나 그 표현은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뜻이다. 다큐멘타리의 개념에는 정보의 전달기록에 현실적(Actual), 역사적(Historical), 사실적(Realistic) 개념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주제나 사건은 사실적, 현실적, 예술적이어야 한다. 다큐멘타리 사진가는 어떤 사회적 문제에서 주목할 만한 사건들의 사진들로 우리가 살았던 시대의 드라마틱한 역사의 기록을 제시해야 한다.

2) 다큐멘터리 사진의 전개

가. 전쟁의 기록과 서부개척시대

전쟁의 기록사진이 여러가지 있겠으나 대표적으로 미국의 남북전쟁의 기록사진일 것이다.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자 매튜 B. 브레디(1823∼1896)는 카메라야말로 역사를 남기는 눈임을 깨닫고 그는 19명으로 구성된 스탭진을 이끌고 전쟁터로 종군하였다.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난 뒤 동부의 극심한 경제불황은 필연적으로 대규모적인 서부개척이라는 명제로 전환되었다. 서부개척의 철도부설에 사진가들을 동원하였다. 그들의 목적은 서부의 새로운 철도 건설과정을 선전할 목적으로 기록하는 것만이 아니라 개척자들이 투자가들에게 관심과 흥미를 갖도록 설득하는 목적이 있었다.

나. 포토 켐페인으로서의 사진운동

미국의 남북전쟁이 끝나고 서부개척이 일단락 매듭을 지어진 미국의 사진계는 그것의 경험을 토대로 일상적인 사회생활을 카메라로 다큐멘타리 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미국의 역사에서 수많은 이민가족들은 미국사회에 상당한 문제거리로 등장되고 있어 정책적으로 이를 개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개혁운동에 사진을 이용하였던 것이 포토 캠페인 운동이다.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활동한 사람이 자곱 리스와 루이스 하인이다.

리스는 비참한 빈민가의 저급한 주택과 비참한 환경을 그대로 방치한 부패에 대항하는 무기로 사진을 촬영하여 그들의 생활개선을 부르짖는 일종의 복지 향상주의자인데 처음에는 문필로 자기의 주장을 펴다가 나중에는 사진으로서 사회개혁을 전개하였다. 리스는 그의 카메라로 자기의 주장을 열거하고 사실적 증거로서 자기의 사진을 예술작품이라 여기지 않았으며 그러한 논쟁에 참여하지도 않고 보다 선명한 사진을 찍는 기술에 관심을 가졌지만 그의 사진은 인간적인 짙은 이해와 감동으로 만들었으므로 매우 위력있고 설득력을 가지고 있다. 사진이 사실의 여론을 일으켜서 정책의 변화를 얻어 성공한 예는 리스의 사진이 처음이었다. 리스는 저술과 사진으로 미국인에게 가난한 사람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가를 보여주었을 뿐만 아니라 뉴욕 빈민 생활상태를 개선시키는 행동을 일으키도록 설득하여 이 당시에 리스는 슬럼가의 해방자라 불리었다.

루이스 하인은 대학에서 사회학을 전공하고 사진이 사회학의 연구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깨닫고 1904년경 사진을 시작하였다. 미국내의 소년노동의 실태를 조사하였는데 소년들은 서부의 석탄광산에서 노동하였으며 노동시간은 오전 7시붙어 오후 5시 30분까지 였고 석탄의 유독한 가스로 호흡기 질병과 철로레일에 위험이 계속되었다. 또한 남부의 목화공장에서 그들은 오전 6시경부터 오후 6시까지 힘든 일을 하였고 그들은 안전표시판에 있는 경고문도 해독하지 못하고 위험한 기계에 의해 손이 절단되기도 하는 악조건에서 노동을 하면서도 기껏해야 몇 푼의 돈으로 많은 식구들의 생활에는 여간 힘이드는 것이 아니었다. 하인은 광산이나 방직공장과 볼링장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표정을 연민의 정을 가지고 촬영하였다.

리스와 하인은 19세기말 부터 20세기초에 살면서 당신의 미국 사회적 현실에 눈을 돌려 그 현실에 감추어져 있는 모순의 근원, 특히 피지배자 계급으로서 국민들의 괴로운 생활 실태를 사진에 의한 캠페인으로 모든 사람에게 알리는데 큰 공헌을 하였다.

다. FSA의 활동

1929년 미국에서 발생한 사상최대의 경제공황은 농업문제에 있어서 아주 심각하여 이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은 콜롬비아 대학의 경제학 교수인 렉스포드 터그웰을 농업안정 보좌관으로 임명하고 과거의 제자이자 동료인 로이 스트라이커를 이 기구의 활동뿐만 아니라 미국농민의 생활상을 심도있게 보도하게 될 방대한 사진촬영 계획을 지휘 할 임무와 더불어 역사분과 의장으로 임명했다. 1937년 이 기구는 농업안정국이라는 이름으로 농민부의 한 분과가 되었다.

워커 에반스는 이 기구에 고용된 최초의 사진가 가운데 한 사람이다. FSA에서 활약이 컸던 그는 미국민과 미국적 형상에 이중적 관심을 기울였다. 그는 남부를 여행하면서 토지의 조건을 기록했고 소작인의 곤궁한 처지와 그들의 가옥과 소유물, 그들이 일하는 방법, 수확한 농작물과 그들이 다니는 학교, 교회 그리고 가계들을 기록했다. 그는 8×10인치 카메라로 건널목 가게들과 작은 마을 거리들 대형 광고판 자동차를 사진에 담았다. 에반스가 찍은 대부분의 대상은 누추한 빈민들 이었으나 그의 해석은 항상 위엄에 넘치는 것 이었다. 그는 주로 전경적 관점에서 찍혀진 것이다. 이 전경성은 단순히 기록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볼륨을 가진 주제에 대한 이차원적인 사용은 연구된 것 처럼 보이고 3차원적인 것에 대한 사용은 투시화법적인 언급을 제거한 것 처럼 보였다. 정상적으로는 깊은 공간의 단서가 되고 하늘은 이 작품에서는 톤의 평면적인 확장이라는 구실만을 한다.

FSA에서 활동했던 사진가들 중에서 도로시 랭(1895∼1965)만큼 다큐멘타리 사진에 큰 영향을 준 사진가는 없다. 소작인들이 황폐된 토지를 버리고 고통스럽게 떠나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하였다. 추위와 가뭄으로 집없이 간이텐트에서 생활하는 "Magrant Mother"의 사진은 무서웠던 추위가 끝날 무렵이었다. 캘리포니아 이주 농민들의 생활과 상태를 기록한 사진으로 이주자들이 일거리를 찾아 이 캠프에서 저 캠프로 이주하며 생활하는 불쌍한 어머니와 그를 둘러싼 세자녀를 묘사한 것으로 이 어머니의 시름속에서 모든 인간의 고뇌와 슬픔이 있는 듯 하다. 그밖에 활약하였던 사진가들은 칼 마이단스, 벤샨 등 FSA에서 활동하였다. 그 빡의 많은 사진가들이 많은 기록사진을 남겼다.

라. Graph-Journalism의 개막

(1) '라이프'의 창간

세계의 그래프 잡지중에서 1936년 11월 23일자 창간호로 탄생된 라이프지 만큼 그래프 저널리즘에 강한 영향력을 미쳤던 잡지도 없었을 것 이다. 시사잡지인 '타임'과 경제잡지인 '포츈'을 그래프 저널리즘의 시대를 전개시킨 요인은 극도로 고도화된 기계문명의 메커니즘에 시달리는 미국인들이 차츰 문자라는 정보전달 매체를 멀리하였고 시간성과 공간성에서 '읽는 것'보다는 한눈에 '보는 것'으로 전환되어 한눈에 '보는 것'으로 지식을 얻어 감흥을 느끼고 시대나 사회성을 파악하려 하였던 것이 미국에서의 그래피 저널리즘의 비약적인 발전의 필연적인 소산물이 되었다. 또 하나의 요인은 그래피 저널리즘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진의 인쇄술과 결합하여 복제의 기능이 가능할 때 대량전달이 가능하게 되는 것 이다. 창간호의 발행부수는 38만부였고 제2호는 41만 5천부, 제3호는 46만부, 제8호에 이르러서는 창간의 2배수인 76만부에 육박하였다. 라이프의 뒤를 이어 1937년 11월에는 '룩크'지가 창간되어 83만 5천부, 제1호는 100만부, 제18호에는 무려 200만부에 달했다. 라이프지는 주간이었고 룩크지는 처음으로 월간으로 발행되다가 동년 5월부터는 격주간으로 발행되었다.

라이프와 룩크가 놀랄만한 반향을 불러일으키자 숱한 저널리즘이 갑자기 그래피 저널리즘으로 탈바꿈하면서 약 1년동안에 Peak Photo, Photo-History, Picture, Now and then 등이 차례로 창간되어 매월 2천만부가 넘는 Picture Magazine이 미국내와 전세계를 시장으로 그래피 저널리즘시대를 만들었다. 이러한 '라이프'의 출현으로 보도사진 전문지가 일약 세계의 해설서로 등장되어 인간의 시각은 확장되어 앉아서 많은 미지의 것을 보고 알게되었다. 그리하여 라이프는 눈으로 보고 확인해야만 하는 현대인의 심리를 충족시켜 시대의 목격자로 괄목할 만한 업적을 남겼다. 라이프의 많은 사진가중에서도 유진 스미드는 꾸준히 라이프지에 독창적인 사진을 스토리 형식으로 게재하여 세계적인 거장으로서의 지위를 굳혔다. (시골의사), (알버트 슈바이쳐박사), 1951년(스페인 촌), (조산부), 1952년(촬영중인 찰리 채플린), 1954년에는 또다시(자비로운 슈바이쳐), 그리고 1972년에는 (일본의 수은병) 등 명작을 포토스토리를 발표하였는데도 스미드는 사회현실의 모순을 분석적으로 비판하려고 한 것보다 인간의 사랑과 행복과 평화를 확신하는 가운데 성실한 인간성을 자신의 애정을 곁들여서 묘사하였다.

(2) Magnum집단

라이프지가 제2차 세게대전에 앞서 1936년에 발간되어 세계의 포토 저널리즘에 획기적인 신기원을 장식했다면 '매그넘'은 이보다 10년이 뒤진 전쟁후의 혼란기에 출발해서 현대사진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강력한 사진가 집단이었다고 하겠다. 다시말해서 '라이프'소속의 사진가와 '매그넘'소속의 사진가들은 20세기 현대사진 발전의 강력한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이다. 매그넘은 미국과 유럽의 뛰어난 보도사진 작가들로 구성된 자유사진가 집단으로 소속 회원들의 사진을 각 언론사에 적극적으로 판매하기 위해 창설된 국제적인 사진 통신사이다. 매그넘이 창설된 것은 1947년이었다. 그러나 창설동기는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36년 봄. 무명 사진가인 프랑스 출신의 노르망디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 헝가리 부다페스트 출신의 로버트 카파, 폴란드 바르샤바 출신의 데이비드 시모어 등 세사람은 우연히 파리의 어떤 신문사 입사시험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였다. 이들은 다시 만나서 신문사 간부의 사진에 대한 이해부족을 개탄하면서 포토 저널리즘이나 사진계에 대하여 불만을 품고있던 야심있는 무명 사진가들이었다. 언론기관은 사진가의 개성을 무시하고 대중에게 영합하는 데에만 급급하였으며 사진판매 대행업자는 사진가로부터 사진을 헐값에 사서 고객에게는 비싸게 팔려고만 하였는데 기성 사진계와 사진가들은 묵묵히 따라가기만 했다. 이런 상황속에서 사진가들은 개성있는 예술작품을 창조하기는 커녕 다만 직인으로서의 테두리를 맴돌다 말았다. 이러한 모순에 도전 예술가로서의 주체성과 자유를 확보하고 싶다는 것이 바로 이 세사람의 염원이었다. 이들은 이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어려움이 많았지만 한번도 목표로부터 이탈된 적이 없었다고 한다.

매그넘의 대표적인 사진가로는 많이 있었으나 그들을 간략히 소개함으로서 매그넘의 활약상, 사진에 끼친 영향을 살펴보고자 한다. 1908년 불란서 노르망디에서 출생한 앙리 까르띠에 브레송은 처음에는 화가가 되기를 원했으나 회화를 멀리하고 사진에만 전념하였다. 그는 작은 카메라를 "내눈의 연장이다."라고 하면서 노 트리밍의 원칙을 고수하며 연출의 개입을 철저히 배제하여 "빛과 구도와 감정의 일치"라는 공식으로 일관하면서 그 이론의 결정판을 1952년에 발간한 (결정적 순간)이란 사진집을 만들었다. 까르띠에 브레송은 1932년∼34년 스페인 지중해 연안 멕시코, 미국 등지를 여행하면서 다큐멘트하였다. 1932년(폐허에서 노는 아이들)과 1937년 런던에서 조오지 6세의 대관식이 있었는데 대관식의 화려한 장면을 촬영하지 않고 그 장면을 구경하려고 일찍 모였다가 급기야 스스로 지쳐서 스탠드에 떨어져 휴지더미 위에서 잠자는 사람을 촬영한 것을 보면 그는 분명히 강력한 휴머니스트 사진가였다.

매그넘의 대표자이며 창설위원회의 한사람이던 로버트 카파는 독일에서 사진공부를 하면서 활동하다 1933년 히틀러가 정권을 잡고 나찌가 득세하자 자유를 찾아 불란서로 건너갔다. 1935년경부터 카파의 사진은 높이 평가를 받기 시작했다. 1936년 스페인의 내란이 일어나자 전선으로 가서 인민 전선파의 한 병사가 참호 속에서 뛰쳐나가 돌격자세를 취하는 순간 머리에 총탄을 맞고 쓰러지는 사진이 라이프지에 게재되자 유명하게 되었다. 또한 카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종군하여 선두부대에 가담하여 빗발치듯 퍼붓는 적탄을 무릅쓰고 극열한 전투장면을 촬여했다. 그때의 사진은 상당히 흔들려서 명료하지 않았지만 2차대전의 보도사진 중 최고의 걸작으로 간주되고 있다.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그 사진은 핀트가 맞지 않고 약간 떨린상태의 사진이지만 이것은 그의 절박한 상황 속에서도 과감히 현장에서 다큐멘트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말하기를 "만약 당신이 찍은 사진이 썩 좋지 않다면 그것은 당신이 대상에 충분히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말을 남기고 전쟁터에서 영원히 머물게 되었다.

마. 인간 가족전

미국에서 세계2차대전을 끝내고 전쟁에 관한 사진 전람회를 몇차례 개최한 일이 있었는데 별로 이렇다할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전쟁의 처절함과 전쟁의 공포를 대대적으로 전시를 하면 전쟁방지 의식이 커지리라 생각했는데 오히려 전쟁에 시달린 미국인들은 그것을 보기조차 싫어하였던 것이었다. 1947년 뉴욕 현대미술관 사진부장에 취임한 에드워드 스타이겐은 이러한 전시의 실패원인을 분석하여 인간에게 가장 귀중한 생명과 사랑과 평화를 사진으로 보여주리라 결심하였다.

세기적인 사진전인 '인간 가족전'은 스타이겐의 이러한 발상을 토대로 뉴욕 현대미술관의 창립 25주년을 기념하기 위한 전람회였다. 그는 이러한 영상을 찾기 위하여 장장 3년 가까이 세계 곳곳으로부터 200만장의 사진을 거두어 들인 후 신중한 심사를 거쳐 68개국 273명의 사진가들의 사진 503점을 남녀, 아마츄어, 프로, 명성, 무명 사진가를 막론하고 선정하였다. 작품의 선정은 예술성이나 구성처리 등에 두지 않고 "인간의 서식처와 환경은 제각기 다르지만 지상의 모든 인간은 비슷한 공통점을 갖고 있으므로 인간 전체는 한가족이라 할 수 있다."는 스타이겐의 이념에 따랐다. 선정된 사진들은 각기 효과적인 크기로 확대되었다. 스타이켄은 이 방대한 사진전의 기획과 편집으로 탁월한 독창성을 발휘하여 세인의 갈채를 받았다. 이 전시의 내용을 보면 인간의 출생으로부터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출생, 육아, 어린이 세계, 연애, 결혼, 가정생활, 공업, 농업, 노동, 교육, 오락, 질병, 전쟁, 고독, 기아, 종교 등을 다룬 이 전람회는 사진의 특성인 언어, 인종, 국경을 초월하여 지상의 모든 인류에게 깊은 감명을 주어 시각언어로서 위력을 보인 인류의 서사시로서 사진의 예술적 창조적 표현으로서 가능성을 보인 사진예술의 집대성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
출처 : 빛그림 사진여행
글쓴이 : 빛도우미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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